히브리 역사 II
HEBREW HISTORY
97:9.15 다윗의 부패한 정치적 기능구조는 히브리 사회관례와는 반대로 북쪽에 있는 땅을 개인적으로 소유하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는 전에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거둬들여졌던 대상(隊商) 관세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우리야Uriah를 죽임으로써 그 포학성이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모든 법 소송들은 예루살렘에서 판결되었는데 “장로들”은 더 이상 공의를 행사할 수 없었다. 폭동이 일어난 것은 당연하다. 오늘날 압살롬Absalom은 선동가로 불릴 수 있는데 그의 어머니는 가나안 사람이었다. 밧세바의 아들─솔로몬─외에도 왕위를 노리는 아들이 여섯 명이 있었다.
* 우리야Uriah - 밧세바의 남편이었던 우리야는 헷 사람이며, 다윗의 37명의 용사 중의 하나로 나열되고 있습니다. 다윗의 37명의 용사는 다윗이 왕이 되기 전부터 함께 했던 충실하고 용맹한 장수들로서 사무엘하와 역대상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야의 집이 예루살렘의 왕궁으로부터 아주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야가 다윗의 아주 가까운 심복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통을 덮으려다가 왕에 대한 우리야의 충성심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자, 요압 장군에게 우리야를 전장터 맨앞으로 보내어 죽게하라는 서신을, 우리야를 통해 전달하게 하여 그를 죽입니다. 그리고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삼습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책망하고, 벌을 내리는데,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기가 태어난 지 7일 만에 죽게되고,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도 다윗이 받게 되는 천벌로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97:9.16 다윗이 죽은 후에 솔로몬은 북부의 영향을 받는 모든 정치 조직을 제거하였지만, 자기 아버지가 정권을 잡았을 당시의 전제정치와 징세 제도는 모두 계속하였다. 솔로몬은 사치스러운 왕실 유지와 자신이 면밀하게 계획한 건축 계획을 진행하기 위하여 국가 재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였다. 그 중에는 레바논에 있는 집, 파라오의 딸의 궁전, 야훼의 성전, 왕의 궁전, 그리고 많은 성읍들의 성벽 재건 등이 있었다. 솔로몬은 거대한 규모의 히브리 해군을 창설하여, 시리아 선원들로 하여금 운영하도록 하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무역을 하였다. 그의 후궁들은 거의1,000명에 이르렀다.
97:9.17 이 무렵에 실로에 있던 야훼의 성전은 신용을 얻지 못하였고, 국가적인 모든 경배는 여부스에 있는 호화스러운 왕궁 경배실로 집중되었다. 북 왕국은 엘로힘 숭배로 더욱 기울어졌다. 그들은 파라오의 지원을 받았는데, 그는 나중에 유다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고 남 왕국에게 공물을 바치도록 하였다.
97:9.18 흥망성쇠가 계속되었다─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의 전쟁들. 4년간의 독립 전쟁과 왕조가 세 번 바뀐 후에, 이스라엘은 육상 무역을 시작한 도시 전제 군주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오므리왕조차도 시므리가 소유한 땅을 구매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살만에셀 3세가 지중해 연안을 통치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그 종말이 신속히 다가왔다. 에브라임의 아합 왕은 10개의 다른 집단들을 모으고 카르카르에서 저항하였으며 그 전투에서는 승부가 가려지지 않았다. 앗시리아 사람들이 공격을 멈추었지만 그러나 동맹군은 격감되었다. 이 큰 싸움은 구약 성서에 기록조차 되지 않았다.
* 오므리(재위 기원전 884년경-873년경)는 분열 이스라엘 왕국의 6대 왕으로 시므리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우상 숭배와 큰 죄악을 저질렀다.
* 어떤 이야기들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들의 관심 밖에 있었기 때문에 성경의 역사 이야기들(예를 들자면, 열왕기서나 역대기서)에 소개되지 않기도 했다. 그 중의 한 예가 카르카르(The Battle of Qarqar) 전투입니다. 앗시리아(우리말 성경. 앗수르)의 군대와 이스라엘의 군대가 대규모로 만난 첫번째 전쟁은 아합 시대였다. 기원전 853년에 살만에셀(Shalmaneser III: 858-824 BCE)의 군대가 가나안과 아람 지역의 나라들이 결성한 연합군과 카르카르에서 전쟁을 벌인다.
97:9.19 아합 왕이 나봇의 땅을 사려 하였을 때 새로운 문제가 시작되었다. 그의 페니키아인 아내가 아합의 이름을 몰래 사용하여, 나봇이 “엘로힘과 왕”의 이름을 모욕하였기 때문에 그 대가로 그의 땅을 몰수하라는 명령서를 만들었다. 그와 그의 아들들은 즉시 사형에 처해졌다. 활력이 넘치는 엘리야가 그곳에 나타나 나봇의 가족을 살인한 것에 대해 아합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하여 가장 위대한 선지자들 중의 하나였던 엘리야는 바알 숭배자들의 땅을 매매하는 태도에 대항하여, 도시들이 농촌을 지배하려는 시도에 대항하여, 땅에 관한 옛 사회관례의 변호자로서 가르침을 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개혁은 농촌 지주인 예후Jehu가 방랑하는 사람들의 족장인 여호나답Jehonadab과 힘을 합쳐서 사마리아에 있는 바알 선지자들(토지 중개인들)을 격퇴시킬 때까지 성공하지 못하였다.
* 예후(재위: 기원전 842년 ~ 815년)는 분열 북이스라엘 왕국의 10대 왕으로 혁명을 일으켜 왕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예후라는 이름의 뜻은 "그는 여호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후 왕조의 초대 왕이다. 선지자 엘리사가 한 사람을 시켜 예후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새 왕으로 세우게 하였다.
예후는 계책을 써서 이스라엘의 모든 바알 숭배자들까지 처형하여 이스라엘에는 단 한명의 바알 숭배자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바알 숭배자들을 처형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예후는 꾀를 썼다. 예후는 여호나답과 함께 바알숭배자 전부와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단 한사람도 빠짐 없이 불러 모아 번제를 드리게 하였다. 그들은 바알신당에 가득 들어가게 하고는 그곳에서 번제가 시작하자마자 신당 바깥에 80명을 배치해놓고 그들에게 한사람이라도 빠져나가게 하는 사람은 죽을 줄 알으라 단단히 일렀다. 그리고 번제를 바치는 순서가 끝나자 예후는 파수꾼들과 장교들에게 들어와서 바알숭배자들을 죽이고 한사람도 도망 못가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그들이 들어와 바알숭배자 및 제사장들을 다 칼로 쳐 죽이고 바알 신당에 세웠던 돌기둥 즉 바알을 상징하는 것과 아세라 여신을 상징하는 나무기둥을 끌어내어 부수어 버린다. 그뿐 아니라 그 신당을 헐어서 열왕기상하를 기록한 그 시대까지도 변소로 사용하게 되었다.
97:9.20 여호아스Jehoash와 그의 아들 여로보암Jeroboam이 이스라엘을 적으로부터 구하였을 때 새로운 삶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에 사마리아에서는 옛날의 다윗 왕조의 귀족 집단이 무색할 정도로 약탈하는 귀족 집단이 지배하고 있었다. 국가와 회당이 서로 결탁하고 있었다. 언론의 자유에 대한 탄압이 엘리야와 아모스와 호세아로 하여금 그들의 비밀 기록을 시작하도록 만들었으며, 이것은 유대인과 그리스도교 성경들의 실제적인 시초가 되었다.
* 여호아스(요아스)(재위 기원전 835년경-796년경)는 분열 유다 왕국의 8대 왕으로 처음에는 신의 뜻에 맞는 일을 했으나 후에는 변절하여 악한 일을 저지르다가 죽었다. 브에르 세바 출신의 어머니 치브야의 아들로 태어나 7살에 왕이 되었다. 처음에 요아스는 여호야다 사제가 살아있는 동안 내내 옳은 일을 했다. 한때는 요아스와 여호야다가 성금으로 돈을 모아 성전 보수를 맡은 이들에게 주고 석수들과 목수들을 고용해 성전을 고치게 했다. 성전 복구가 끝난 뒤 남은 돈은 그것으로 집을 위한 기물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 내내 신에게 번제물을 바쳤다. 그러나 여호야다 사제가 130살로 죽자 유다의 대신들의 말을 듣게 되었고 신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 여로보암(재위 기원전 998년경-977년경)은 분열 북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으로 남왕국 유다와는 다른 집안의 사람이다.여로보암 가문의 1대 왕이다.
여로보암은 느밧과 과부 스루아의 아들로 스레다 출신의 에브라임 사람이었다. 솔로몬 왕이 밀로 궁을 건설하고 다윗 성의 갈라진 틈을 보수할 때 솔로몬은 여로보암이 강한 용사일 뿐 아니라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고 그를 요셉의 집의 강제 노역의 감독자로 임명하였다. 그때 예루살렘으로 가다가 예언자 아히야를 만나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질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 이 이야기가 솔로몬 왕에게 알려져 죽을 것을 알고 이집트의 왕 시삭에게로 도망쳤다. 기원전 998년경에 솔로몬 왕이 죽자 여로보암은 이집트에서 돌아와 10지파의 지지를 받아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산악 지방에서 살다가 세겜을 세우고 거기서 살다가 다시 나와 브누엘(브니엘) 세웠다. 그런데 북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사드리고 르호보암에게 갈게 될걸 알고 결국은 자신을 다시 배신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베델(Bathel)과 단(Dan)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했으며 사제는 레위 제사장들이 아닌 일반 백성들을 임명하였다. 또한 여덟째 달 십오일을 절기로 정해서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만들었으나 결국은 온 민족을 우상 숭배의 길로 이끌었다(열왕기상 12:31-33).
* 비밀 기록 - 유대인과 그리스도교 성경들의 실제적인 시초
97:9.21 그러나 북 왕국은 이스라엘의 왕이 이집트의 왕과 음모를 꾸며서 아시리아에게 더 이상 공물을 바치지 않기로 하기 전까지는 역사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3년 동안 포위 공격이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북 왕국은 전부 흩어지게 되었다. 에브라임(이스라엘)은 그렇게 해서 사라졌다. 유다─유대인들, 즉 “이스라엘의 잔존자들”─는 이사야가 “집을 가진 자가 더 갖고 땅을 가진 자가 더 갖는다.”고 말한 것처럼 땅의 소유권은 소수의 무리들에게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예루살렘에는 야훼의 성전 옆에 나란히 바알의 성전이 있게 되었다. 이 공포의 통치시대는, 야훼를 위하여 35년 동안 개혁운동을 벌린 소년 임금 요아스Joash가 이끈 유일신교 폭동으로 말미암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97:9.22 그 다음의 왕인 아마시아Amaziah는 에돔 사람들과 그 이웃들이 세금 납부를 거역하는 폭동으로 고통을 당하였다. 현저한 승리를 거둔 후에 그는 북쪽에 있는 이웃들을 공격하였고 똑같이 현저하게 패배를 당하였다. 그러자 시골에 있는 무리들이 폭동을 일으켰으며 왕을 암살하고 16살이 된 그의 아들을 왕위에 앉혔다. 그가 바로 아마시아인데, 이사야는 그를 웃시야Uzziah라고 불렀다. 웃시야가 물러난 후에는 상황이 더욱 나빠졌고, 유다는 아시리아의 왕들에게 공물을 바침으로써 100여 년 동안 존속될 수 있었다. 첫 번째 이사야는 그들에게 야훼의 성읍인 예루살렘이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것이 함락될 것임을 주저하지 않고 선포하였다.
97:9.23 유다의 실제적인 파멸은 소년 왕인 므낫세의 통치 아래에서 일한 정치인들의 경쟁적인 타락과 치부로 인하여 초래되었다. 변화하는 경제 체제로 말미암아 바알 경배가 융성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사유지 매매는 야훼의 관념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앗시리아Assyria의 몰락과 이집트의 패권이 유다를 잠시 동안 해방하였고, 시골 세력이 우세하게 하였다. 요시아Josiah의 통치 아래에서 그들은 타락한 정치인들의 예루살렘 동맹을 격퇴시켰다.
97:9.24 그러나 이 시대는 바빌로니아에 대항하는 앗시리아를 돕기 위해 이집트로부터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는 네코Necho의 강력한 무리를 가로막기 위해 요시야가 시도하였을 때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었다. 그는 철저히 실패하였고, 유다는 이집트에게 공물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다. 바알을 섬기는 정치 집단이 예루살렘에서 다시 권세를 장악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실제real 이집트인 속박이 시작되었다. 그러고 나서 바알을 추종하는 정치인들이 사법권과 사제 계급을 통제하는 시대가 되었다. 바알 경배는 땅의 비옥함과 관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재산 소유권과 관계되는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체계였다.
97:9.25 느브갓네살에 의해 네코가 패배함으로써, 유다는 바빌로니아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10년 동안 특별한 대우를 받았지만 곧 반란을 일으켰다. 느브갓네살이 그들을 공격하려고 왔을 때, 유다 사람들은 야훼를 자극시키기 위하여 노예들을 풀어주는 등, 사회적인 개혁을 시작하고 있었다. 바빌로니아의 무리가 일시적으로 물러가자, 히브리인들은 자기들의 마술적인 개혁이 자기들을 구원하였다고 기뻐하였다.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임박한 파멸을 선언한 것은 바로 이 때였으며, 얼마 안 있어서 느브갓네살이 되돌아왔다.
97:9.26 그리하여 유다의 종말이 갑작스럽게 임하였다. 그 성읍은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갔다. 야훼-바알 투쟁은 포로가 됨으로써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남은 사람들은 포로가 되는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충격을 받고 유일신교으로 변하게 되었다.
97:9.27 바빌로니아에 있는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작은 집단으로서는 자기들의 특별한 사회적 경제적 관습들을 유지하면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만약에 자기들의 관념이 우세하다면 그 이방인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운명에 대한 그들의 새로운 개념─유대인들이 야훼의 선택받은 종들임에 틀림없다는 개념─이 기원되었다. 구약 성서의 유대 종교는 실제적으로는 포로가 되었던 바빌로니아에서 진화되었다.
97:9.28 불멸성에 대한 교리 역시 바빌로니아에서 형성되었다. 유대인들은 사회적인 공의에 대한 자기들의 복음에 대한 강조와는 동떨어진 내세의 관념을 생각해 왔었다. 이제는 처음으로 신학이 사회학과 경제학을 대치시키게 되었다. 종교는 인간의 생각과 행위의 체계로 모양을 갖추게 되었고 정치와 사회 그리고 경제로 부터 점점 더 분리되게 되었다.
97:9.29 그리고 유대 민족에 관한 진실이 밝혀지는 만큼, 신성한 역사로 여겨져 온 많은 것들이 일상적인 세속적 역사의 기록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유대주의가 그리스도교를 발전시킨 토양이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유대인들은 초자연적인 민족이 아니었다.
UrantiaBook [97:9.15~29]
제 97 편 히브리인 사이에서의 하나님의 개념의 진화
9. 히브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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