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란시아서를 새롭게 번역했습니다
blog.daum.net/amethyst1992111/7392
오랜만에 들어왔습니다.
그동안...1년 8개월만에 유란시아서를 새롭게 번역했습니다.
개인이 번역하기에는 불가능하다고 어딘가에 표현되어 있지만 결국 해냈습니다.
유란시아서 원문에서 정말로 중요하게 지적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심'인데,
기존 번역에는 그 religion을 무조건 '종교'라고 번역했더군요.
즉, religion of Jesus와 religion about Jesus를 구분하는 것이 결론에 해당하는데.
이를 '예수의 종교와 예수에 대한 종교'라고 번역한 것이 기존의 것입니다.
정작 메시지가 전하려는 것은 '예수의 신앙심'인데, 그것이 기존의 기독교라고 오인되게 번역했군요.
그래서 기존의 번역은 아무리 읽어도 결론적 핵심을 잡지 못합니다.(내가 비교해본 기존 번역판은 두 가지였습니다)
내가 번역한 것 중에서 맨 마지막 196장을 올려놓습니다.
사실상...이번에 새로 번역한 것을 어딘가 새로운 싸이트 혹은 새로운 공간에 공개하고 싶습니다.
근데...방법, 루트 등등 잘 몰라요.
관심있으신 분은 연락 주십시오.(쪽지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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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6편 예수의 신념
196:0.1 예수는 숭고하게 또한 專心으로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통상적인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인간 생활을 경험했지만, 하나님의 보살핌과 안내에 대한 확신을 결코 신앙적으로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념은 그 신성한 현존, 곧 그에게 내재하고 있는 조정자의 활동에서 생겨난 통찰력의 자연스런 산물이었습니다. 그의 신념은 전통적이지도 않았고 단순히 知的이지도 않았습니다. 그 신념이 완전히 개인적이고 또 순수하게 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196:0.2 그 인간적인 예수는 하나님이 참되고 아름다우며 선할 뿐만 아니라 거룩하고 공정하며 또 위대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신성의 이런 모든 속성들을 자신의 정신 속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으로 집중하였습니다. 예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및 '하늘 안에서 살면서 사랑하고 있는 아버지'와 전혀 동일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보는 개념을 예수가 창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啓示를 완수함으로써, 또한 모든 인간 피조물마다 이 사랑의 아버지의 자식, 곧 하나님의 한 아들이라고 선포함으로써 그 생각을 하나의 숭고한 체험으로 높이고 또 들어 올렸습니다.
196:0.3 어떤 고군분투하는 사람이 그 우주와 싸우면서 한편으로 적개심에 불타고 또 죄 많은 한 세상과 결사적으로 씨름할 것처럼, 예수는 하나님에 대한 신념에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단지 곤경 한가운데의 한 가지 위안으로서 또는 절망의 위협 속에 있는 하나의 위로로서 신념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념이 그저 불쾌한 현실과 생활의 슬픔에 대한 허망한 보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활 속에서 모든 자연스러운 곤경 및 속세의 모순들과 바로 직면하는 가운데, 그는 의심을 갖지 않고 최고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平靜을 체험했으며, 그 거룩한 아버지의 바로 그 현존 가운데에서 자신의 신념으로써 생활의 엄청난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승리를 거둔 이 신념은 실제로 영에 도달한 하나의 살아 있는 체험이었습니다. 인간의 체험이 가지는 가치들에 대해서 예수가 크게 기여한 점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하여 그가 아주 많은 새로운 관념들을 드러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신뢰 가운데 어떤 새로우면서도 더욱 고귀한 유형을 아주 훌륭하게 또한 인간의 방법으로 실증했다는 점입니다. 이 우주의 모든 세상들에서 누구라도 한 인간의 삶 속에서 나사렛 예수의 인간적인 체험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그처럼 살아있는 하나의 실체가 된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196:0.4 그 지역 창조세계에 속한 모든 다른 세상들과 이 유란시아는 유란시아에서 영위했던 스승님의 삶 속에서 하나의 새로우면서도 더욱 고귀한 유형의 신앙심을 발견하는데, 우주보편적인 아버지와의 개인적인 영적 관계에 기초를 두고 또한 진정한 개인적인 체험의 최고 권한으로써 완전히 정당하게 확인된 신앙심입니다. 예수의 이 살아 있는 신념은 어떤 知的 반영을 넘는 것이며, 어떤 신비스러운 명상이 아니었습니다.
196:0.5 神學은 신앙을 고정시키고 공식화하며 정의하고 또한 교의로 만들 수도 있지만, 예수의 삶에 있는 신념은 그만의 것이고, 살아 있으며, 독창적이고, 무의식적이며, 또한 순수하게 영적이었습니다. 이 신념은 전통에 대한 존경심도 아니고 하나의 성스런 신조로서 그가 지녔던 어떤 단순한 知的 믿음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하나의 숭고한 체험이요 또 그를 단단히 붙든 심원한 확신이었습니다. 그의 신념은 너무나 참되고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영적 의심이라도 절대적으로 쓸어버렸고 또한 상반되는 모든 소망을 효과적으로 없앴습니다. 아무 것도 열렬하고 숭고하며 기가 꺾이지 않는 이 신념의 영적 정박지로부터 그를 떼어낼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외견상 명백한 패배에 직면하거나 실망 및 위협적인 절망에 한창 시달릴 때에도, 그는 두려움 없이, 또한 영적으로 敵이 없다는 것을 완전히 의식하고서 그 신성한 현존 안에 침착하게 서있었습니다. 예수는 위축되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힘찬 확신을 지녔으므로, 그의 삶에서 시련의 상황을 만날 때마다 아버지의 뜻에 대한 하나의 절대적인 충성심을 틀림없이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이 훌륭한 신념은 심지어 수치스러운 죽음에 대한 그 잔인하고 압도적인 위협에 의해서도 움츠러들지 않았습니다.
196:0.6 어떤 종교적인 天才의 경우에 있어서는 강한 영적 신념이 아주 흔하게 비참한 狂信으로, 곧 종교적인 자아를 과장하는 것으로 직접 이끌지만, 예수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특별한 신념과 영적 업적으로 인해 실제적인 삶 속에서 불리하게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영적 찬양은 그가 하나님과 함께 몸소 겪는 체험을 그의 영혼이 완전히 무의식적이고 자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96:0.7 모든 것을 불사르며 굴하지 않는 예수의 영적 신념은 결코 광신적으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신념이 실제상의 평범한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도덕적인 삶의 상황들의 균형이 잡힌 가치들에 관하여 균형이 잘 잡힌 그의 지적 판단력과 함께 달아나려고 결코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人子는 훌륭하게 하나로 통일된 인간의 인격체였습니다. 그가 천부적인 자질을 완벽하게 부여 받은 신성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또한 단 하나의 인격체처럼 땅에서 활동하는 인간적이고 또 신성한 하나의 통합된 존재로서 훌륭하게 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스승님은 언제나 그 영혼의 신념을, 자신이 겪은 경험에 대해 자신의 지혜로 평가한 것과 함께 조정했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신념과 영적 희망 및 도덕적 헌신은 개인적인 명예, 가족에 대한 사랑, 종교적인 책무, 사회적인 의무, 그리고 경제적인 필요성과 같은 모든 인간적인 충실성의 실체와 성스러움을 날카롭게 깨닫는 것과 조화롭게 연결되어, 비할 데 없이 종교적으로 하나로 통합된 가운데 언제나 서로 관련되었습니다.
196:0.8 예수의 신념은 모든 영적 가치들을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상상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먼저 하늘나라를 찾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그 하늘나라의 진보되고 또 이상적인 우정 속에서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완성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그 기도의 바로 그 핵심은, "아버지의 나라가 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함유하는 것으로 그 하늘나라를 이렇게 마음에 그렸기 때문에, 놀랍도록 자기 자신을 망각하고 또 한없는 열정으로써 이를 실현하는 운동에 자기 자신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그의 모든 강렬한 사명에 있어서, 또한 그의 특별한 삶 전체를 통해서, 광신자의 격정도 나타나지 않았고, 종교적인 이기주의자의 얄팍한 공허함도 결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96:0.9 스승님의 전체적인 삶은 이 살아 있는 신념, 곧 이 숭고한 종교적 체험에 의해서 시종일관 조절되었습니다. 이 영적 태도는 그가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 그가 믿는 것과 기도하는 것, 그리고 그가 가르치는 것과 전파하는 것을 완전히 지배했습니다. 그 거룩한 아버지의 안내와 보호에 대한 확신과 보증 속에 있는 한 아들의 이런 개인적인 신념은 자신의 독특한 삶에 영적 실체에 관한 하나의 심원한 자질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이 갈릴리 사람, 곧 하나님의 갈릴리 사람이 신성과의 가까운 관계를 이렇게 아주 깊이 의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자신을 '선한 선생'이라고 말했을 때에 순간적으로, "당신은 왜 나를 선하다고 말합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아를 망각하는 그러한 훌륭한 태도와 우리가 마주쳐 섰을 때, 우리는 그 우주보편적인 아버지가 자신을 그에게 그렇게 완전히 나타내고 또한 그를 통해서 그 영역의 인간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196:0.10 예수는 그 영역의 한 사람으로서 모든 헌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님에게 가져왔습니다. 즉, 신성한 뜻을 행하는 그 위엄 있는 봉사에 자기가 가진 뜻을 성스럽게 드리고 또 헌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종교를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의 관점으로 언제나 시종일관되게 풀이했습니다. 여러분이 종교적인 삶에 관한 기도나 어떤 다른 모습에 관해서도 스승님의 생애를 연구할 때에는,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보는 것보다 그가 무엇을 행했는지 보십시오. 예수는 결코 어떤 종교적 의무로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祈禱라는 것은 자신의 영적 태도에 대해 진실하게 표현하는 것, 영혼의 충성심에 대해 선언하는 것, 개인적인 헌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감정적인 긴장을 회피하는 것, 갈등을 예방하는 것, 知的 작용을 고취시키는 것, 자신의 소망을 고상하게 만드는 것, 자신의 도덕적 결심을 정당화하는 것, 생각을 풍부하게 만드는 것, 더욱 고귀한 성향에 힘을 북돋아주는 것, 마음의 충동을 거룩히 바치는 것, 자신의 관점을 淨化하는 것, 자신의 신념을 선언하는 것, 하나님의 뜻에 초월적으로 굴복하는 것, 확신을 숭고하게 주장하는 것, 용기를 드러내는 것, 발견한 것을 선언하는 것, 최고의 헌신을 고백하는 것, 거룩한 헌신을 확인하는 것, 곤경을 조정하기 위한 하나의 기법, 그리고 이기심과 악 및 죄를 향하는 모든 인간적인 성향들에 저항하기 위해 영혼의 결합된 권능들을 강력하게 동원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에 대해 신앙심 깊게 헌신하는 바로 그러한 삶을 영위했고, 바로 그러한 기도와 함께 자신의 삶을 의기양양하게 끝냈습니다. 견줄 데 없는 그의 종교적 삶의 비결은 하나님의 현존을 이렇게 의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指導나 음성이나 환상이나 특별한 종교적 관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知的 기도와 진실한 예배에 의해서, 곧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제에 의해서 그 비결을 얻었습니다.
196:0.11 예수의 세속적인 삶에 있어서 종교는 하나의 살아 있는 체험, 곧 영적 경외감으로부터 실용적인 正義로 직접 그리고 몸소 이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신념은 그 신성한 영의 초월적인 열매들을 맺었습니다. 그의 신념은 어떤 어린아이의 것처럼 미숙하고 또 쉽사리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어린아이의 정신 속에 있는 그 의심하지 않는 신뢰를 많은 면에서 닮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어린아이가 부모를 신뢰하는 것과 많이 비슷하게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그 우주에 대한 심원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의 부모라는 환경 속에서 가지는 것과 같은 바로 그런 신뢰를 가졌습니다. 그 우주의 근본적인 선함에 대한 예수의 專心의 신뢰는 어린아이가 자신의 세속적인 환경의 안전성을 신뢰하는 것과 대단히 닮았습니다. 그는 어린아이가 자신의 세속적인 부모에게 기대는 것처럼 그 거룩한 아버지에게 의존했으므로, 그의 뜨거운 신앙은 그 거룩한 아버지의 보살핌에 대한 확실성을 결코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려움, 의심, 그리고 懷疑에 의해서 심각하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不信이 그의 삶에서 자유롭고 독창적인 표현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충분히 성장한 한 사람의 굳건하고 知的인 용기를, 부모를 믿는 어린아이의 성실하고 신뢰하는 낙관주의와 함께 하나로 결합했습니다. 그의 신앙은 두려움이 전혀 없는 그러한 신뢰의 절정까지 성장했습니다.
196:0.12 예수의 신념은 어린아이의 신뢰가 지닌 그 순수성을 얻었습니다. 그의 신념은 아주 절대적이고 또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동료 존재들과의 접촉에 관한 매력에 대해, 또한 그 우주의 경이로운 것들에 대해 응답했습니다. 그 신성한 것에 대한 그의 의존감은 아주 완전하고 또 아주 자신이 넘쳤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절대적인 안전에 대하여 기쁨과 확신을 낳았습니다. 그의 종교적 체험 안에는 망설이는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충분히 성장한 그 사람의 이 거대한 知力 속에서 그 어린아이와 같은 신념이 종교적인 意識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들을 최고로 지배했습니다. "여러분이 한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그 하늘나라로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그가 한때 말했던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신앙이 어린아이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유치하지 않았습니다.
196:0.13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기를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와 함께 믿으라고, 곧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실체를 믿고 또한 그 거룩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확신에 대한 안전성을 완전히 신뢰하고 받아들이라고 요구합니다. 스승님은 자신의 모든 추종자들이 자신의 초월적인 신앙을 완전히 나눠 가지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는 자기가 믿은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믿은 것처럼 믿으라고,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아주 감동적으로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나를 따르시오."라는 그의 한 가지 최고 요구조건이 가진 충분한 意義입니다.
196:0.14 예수의 세속적인 삶은 한 가지 중요한 목적, 곧 종교적으로 신앙에 의해서 인간의 삶을 영위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에 바쳐졌습니다. 예수의 신앙은 어린아이가 부모에 대해서 가지는 신념처럼 신뢰하는 것이었지만, 추정만 하는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강건하고 남자답게 결정을 내렸고, 다양한 실망감에 용감히 정면으로 부딪쳤으며, 터무니없이 특별한 곤경을 단호하게 극복했고, 또한 의무가 가진 엄격한 요구 조건들에 주춤하지 않고 직면했습니다. 예수가 믿은 것을 믿고 또한 그가 믿었던 것처럼 믿는 데에는 강한 의지와 무한한 확신을 필요로 했습니다.
1. 인간 예수
196:1.1 예수가 아버지의 뜻과 인간에 대한 섬김에 헌신한 것은 실로 인간의 결심과 인간적인 결단력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제한 없이 사랑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 자기 자신을 專心으로 헌신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미카엘이 가진 통치권이라는 사실이 아무리 중대하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사람들로부터 그 인간적인 예수를 빼앗아 가면 안 됩니다. 스승님은 하나님으로서 뿐만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속하고, 사람들이 그에게 속하기 때문입니다. 고군분투하는 인간들로부터 그 인간적인 예수를 빼앗아 갈만큼 그 신앙심 자체가 잘못 이해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이나 신성에 대한 토론이, 나사렛 예수가 신앙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고 또 행하는 것을 성취했던 하나의 종교적 인간이었다는 그 구원의 진리를 가리게 하지 마십시오. 그가 유란시아에서 일찍이 살았던 참으로 가장 종교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196:1.2 19세기의 신학적인 전통들과 종교적인 敎義들 한가운데에서, 그 인간적인 예수가 자신이 묻힌 무덤으로부터 상징적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증언할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인간적인 나사렛 예수는 심지어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라는 그 화려한 개념에 대해서도 더 이상 희생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이런 啓示의 발표문을 통해서 그 人子가 전통적인 神學의 무덤으로부터 회복되어서, 그의 이름을 지니는 교회에 대해서 또한 모든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 살아 있는 그 예수로서 제시된다면, 얼마나 초월적으로 봉사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기독교 신자들의 동료 의식은,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에 대해 종교적으로 헌신하고 또한 인간을 私心 없이 섬기는 것에 대해 거룩하게 헌신했던 스승님의 진짜 삶을 實證하면서 그 스승님의 뒤를 따라가게 만들어줄 수 있을 때, 자신의 생활 속에 있는 신앙에 관해서 또한 관행에 관해서 그러한 조정 작업들을 행하는 데에 분명히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칭 기독교 교인들이, 사회적인 체면과 이기적인 경제적 불공정행위에 관한 자기들의 오만하고 또 형제들에게 헌신하지 않는 동료 의식이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합니까? 만일 갈릴리의 그 예수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정신과 영혼 속에서 개인적인 종교적 생활의 理想으로서 다시 자리를 잡는다면, 전통적인 교회 조직의 권위가 위험에 빠지거나 혹은 심지어 뒤엎어질 가능성 때문에, 제도적인 기독교 신앙이 두려워합니까? 만일 예수의 살아 있는 신앙심이 예수에 관한 신학적인 종교를 갑자기 갈아치운다면, 기독교 문명에 관한 사회적인 재조정, 경제적인 변화, 도덕적인 원기 회복, 그리고 종교적인 수정에 관한 일들이 정말로 격렬하게 또한 혁명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196:1.3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의 종교적인 신념을 몸소 나누고 또한 인간을 위해 私心 없이 섬기는 스승님의 삶에 있는 정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 생활 안에 있는 가장 중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는 예수가 믿었던 것을 찾아내고, 그의 理想을 발견하며, 또한 그의 고귀한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애쓰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지식 가운데에서 가장 커다란 가치를 가지는 것은 예수의 종교적인 삶과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 것입니다.
196:1.4 보통사람들은 예수의 말을 기쁘게 들었으므로, 그러한 진리들이 세상에 다시 선포된다면, 거룩히 바친 종교적 動機를 가진 그의 성실한 인간적인 삶을 발표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반응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가 자기들 가운데 하나요, 꾸밈없는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기쁘게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 선생이 정말로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196:1.5 육체를 입은 예수의 외관적인 삶을 문자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신념을 함께 나누는 것이 하늘나라를 믿는 사람들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한 것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가 사람들을 믿었던 것처럼 사람들을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이나 사람들이 형제인 것에 관하여 결코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 하나에 대한 살아있는 實例였고, 다른 하나에 대한 심원한 實證이었기 때문입니다.
196:1.6 사람들이 인간적인 것에 대한 意識으로부터 신성한 것에 대한 깨달음까지 진보해야만 하는 것처럼, 예수는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하나님의 본성을 의식하는 데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스승님은 자신의 인간적인 知力이 갖는 신념과 자신에게 내재하고 있는 조정자의 행위들이 공동 연대하여 이룩한 업적으로 말미암아,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신성한 것으로 올라가는 이런 위대한 상승을 해냈습니다. (인간성의 실체를 내내 충분히 의식하면서) 神性의 완전함을 달성하는 것에 대하여 이를 사실로 실현하는 데에는, 점진적으로 신성하게 변화하는 것을 신념으로 의식하는 일곱 단계가 수반되었습니다. 점진적으로 자아를 실현하는 이런 단계들은 스승님이 자신을 부여하는 체험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특별한 사건들로 말미암아 구별됩니다.
1) 사고 조정자가 도착한 것.
2) 그가 대략 열두 살쯤 되었을 때, 예루살렘에서 임마누엘의 메신저가 그에게 나타났던 사건.
3) 그가 세례를 받으면서 여러 가지 표시들이 수반된 것.
4) 변형의 산에서 겪은 체험들.
5) 상물질로 부활한 것.
6) 영이 승천한 것.
7) 그의 우주에 대한 무제한적인 통치권을 부여하면서 마침내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품에 안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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