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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이야기

유란시아서 - 김진욱의 증언 (게시판 펌글)

유란시아'라는 책...

이름 : 김진욱     번호 : 175
게시일 : 2004/04/15 (목) AM 04:52:51     조회 :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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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 wrote:

얼마전에 영화 "예수 수난"을 본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오늘 날의 기독교인이 보기에는 당시의 유대인들이야 말로 죄인이며 진리를 부정한 엄청난 이단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더 말할나위가 없지요

그 당시 유대인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모든 것을 주관하는 이로 그의 신성을 절대로 믿으며, 언젠가는 이 땅에 "메시아"가  내려오시어  오늘의 고통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여 영원한 나라의 백성으로 회복시키시며 모든 핍박하는 자와 압제자를 멸망시킬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고통받는 당시의 현실에서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구원의 "메시아"에 대한 말로 이해되었겠지요.

선조 대대로 전해오는 이 희망의 "메시아"를 믿고 기다려온 유대인에게 "내가 그이니라" 선언하는 예수님이 나타나서 현재의 핍박과 고통에서 구원받는 자신들을 위로해주기는 커녕 "너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니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그것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이니라" 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었으니 어찌 참을 수 있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언젠가 "메시아"가 다시오셔서 세상의 악을 섬멸하고 자신들을 영원한 하늘나라 백성으로 다시 새롭게 탄생시킨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지요.  그런 "메시아"가 있었기에 그 모든 삶의 고난에서도 희망을 잃지않고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은 단지 "메시아"를 설명하는 글일뿐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메시아"만을 기다렸지요

그러니 진짜 구원자가 나타났는데도....그 오랜 세월 자신들에게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메시아"라는 생각을 도저히 할수도 없었고,  기적과 능력으로 자신들을 구원해주기는 커녕 "그런일 하려고 온게 아니라"고 말을하고 있으니 얼마나 황당하고 죽이고 싶도록 미웠겠습니까?  

이 영화는 그 유대인의 증오를 아주 실감있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우리의 사도신경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가 유대인의 증오와 범죄를 교묘히 감춘 것이 아닐까 의심나게 하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위의 영화 얘기에서 단어를 몇개 바꾸어 생각해 보지요.  "유대인"을 현재의 일부 (광신적이고 맹목적) "기독교인"  그리고 "메시아"를 "예수님"으로 바꾸었을 때... 이게 말이 되는 얘기인지 다시 한번 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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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모든 것을 주관하는 이로 그의 신성을 절대로 믿으며, 언젠가는 이 땅에 "예수님"이 내려오시어  오늘의 고통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여 영원한 나라의 백성으로 회복시키시며 모든 핍박하는 자와 압제자를 멸망시킬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고통받는 당시의 현실에서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구원의 "메시아"에 대한 말로 이해되었겠지요.

선조 대대로 전해오는 이 희망의 "예수님"을  믿고 기다려온 기독교인에게 "내가 그이니라" 선언하는 예수님이 나타나서 현재의 핍박과 고통에서 구원받는 자신들을 위로해주기는 커녕 "너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니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그것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이니라" 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었으니 어찌 참을 수 있었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은 언젠가 "예수님"이 다시오셔서 세상의 악을 섬멸하고 자신들을 영원한 하늘나라 백성으로 다시 새롭게 탄생시킨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지요.  그런 "예수님"이 있었기에 그 모든 삶의 고난에서도 희망을 잃지않고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은 단지 "예수님"을 설명하는 글일뿐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기다렸지요

그러니 진짜 구원자가 나타났는데도....그 오랜 세월 자신들에게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예수님"이라는 생각을 도저히 할수도 없었고,  기적과 능력으로 자신들을 구원해주기는 커녕 "그런일 하려고 온게 아니라"고 말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황당하고 죽이고 싶도록 미웠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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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은 예수님의 말씀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알게 해주는 책입니다.  읽어보지도 않고 판단하거나, 원래의 뜻과 다르게 왜곡하면  2,000년 전의 유대인과 똑 같은 짓을 지금에 다시 하는 것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못 박았던 귀 막히고 눈 감겼던 유대인이 죄인이었다면,  예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지금의 현실에서 이단자가 아닐까요?  진짜 이단은 예수님을 우습게 알고 욕되게 하는 자입니다.

유란시아 책을 몰랐기에 듣지못한 것과  알았는데 들으려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잔짜 이단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빠를수록 좋습니다.


김진욱 wrote:


아주 좋은 비유를 잘 읽었습니다.
저도 한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몇자 적습니다.

소위 '이단'이라는 말인데...

이 단어가 지금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퍼스낼리티들 간에 의견교환이 잘 되어야 하는데, 우리 인간들에게는 의견교환의 수단인 용어가 잘 통일되어 있지 않으면 혼란이 발생하고 의사전달의 효율이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가끔은 용어의 의미를 서로 다르게 알고 있어서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의견이 전달되는 경우도 있지요. 인간이 쓰는 용어들을 무시할 필요는 없지만 용어가 정보교환의 수단으로서 가지고 있는 이런 현상들을 이해하고 있어야 우리가 좋은 의견교환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단 이단의 정의를 보면 대체로 다음의 설명이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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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異端)이란 용어는 헬라어 'haireses'에서 파생된 것인데 영어로 Heresy, 독일어로 Ketzrei, 라틴어로 Haeresis, 희랍어로 Hairesis라고 쓰여진다. 본래 뜻은 '선 택박은 자, 뽑힌 자'로서 처음에는 어떤 특출난 철학적 학파를 지칭하였다. 그러나 점차 신학적 오류를 지닌 분파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고 초대교회에서는 일반 적인 교회의 교리와 다른 주장. 교리를 내세우는 개인. 집단을 지칭할 때 사용했다. 기독교는 초기부터 변질된 신앙의 도전으로부터 정통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이단과 싸웠다. 그런데, '이단'의 한자적 의미는 '끝이 다르다'는 뜻으로, '처음은 같으나 끝이 다른 것이 이단이다'라는 해석이 나오게 된다. 이는 성경에서 본래 말하는 'Hairesis'라는 단어의 뜻과 다르다. 따라서 '이단'을 '이설'로 이해하면 더 쉬울 것이 다. 또한 이단은 불신앙이나 비신앙, 의심이나 회의를 하는 것과는 구별된다. 기독 교를 믿으면서도 기독교 진리의 일부분을 오해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이단과는 다른 개념이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의나 교리를 부인하면 이단인 것이다. 정통의 기준에서 위배되는 것이 이단이라고 할 때, 이단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정통진리의 기준이 먼저 세워져 있어야 한다. 정통진리 없이 이단이 존재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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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단이라는 말이 어떻게 활용(사용이라는 말보다는 활용되고 있다고 봐야 옳겠다.) 되어지고 있습니까. 주로 기독교의 사람들이 이 말을 잘 사용하니까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상황들을 볼라치면 일단 그들이 이단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가지고 있는 기준이 맞지 않거나 박약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어설픈 기준을 가지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그것을 이단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그래도 봐줄 수 있는 현상입니다.

악질적으로 이단이라는 말이 잘못 사용되어지고 있는 예는 그저 자기 의견과 다르면 이단이라고 몰아 부치는 현상입니다. 또 자기 이익에 배치되면 이단이라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에 사람 더 끌어모으기 위하여 앞에 있는 교회, 옆에 있는 교회들은 모두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현상입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 교회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들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오류들에 의해 의지생물들 간에 죽음까지도 초래하는 현상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란시안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할까. 당연히 이 용어의 구속에서 초월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전시회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거 이단이 아닙니까' 하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예, 맞습니다. 이단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이단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사회에서 이단을 구분하는 기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설명을 시작합니다.

누구든지 남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으면 자신의 의견을 존중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떤 교파나 교리를 이단이라고 한다면 그 교파나 그 교리는 나를 이단이라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단논쟁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고 오히려 악을 조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 어떤 교파나 교리가 이단인가 아닌가 분석을 하는 것은 바로 그 시점에서부터 악을 조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세시대 로마 카톨릭 공회, 종교회의에서 많은 이단들을 가려내었습니다. 과연 그들이 한 일이 무엇이었나요.

혹자는 그러면 선량한 사람들이 사이비 교주들에게 미혹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질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건, 굳이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서 기준을 마련할 만큼 복잡한 것도 아닙니다.

첫째, 돈을 요구하고 있는가.
둘째, 사람이건 물건이건 어떤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걸 숭배하고 있는가.
세째, 반복된 구호나 반복된 행동을 강요하여 의지생물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있는가.

이 세가지 기준이면 사이비 교주들을 모두 구분해낼 수 있습니다.
강요되지 않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지 않는다면 이 세가지 기준만으로도 충분히 이단을 막을 수 있습니다. 설사 큰 교회, 정통교회라고 하더라도 위 세가지 기준에서 어긋나 있다면 나는 '그것은 분명 옳은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유란시아 한국대표 김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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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우리의 우주 이웃

The Urantia Book - Our Cosmic Neighborhood